관적 합리성을 잃고 사변적 내지 관념적 체계에 사로잡히게 됨으로써 현실사회와 유리되어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공론(空論)만을 일삼는 폐단에 빠져 있었다. 특히 임진 · 병자의 양란 이후 사회 · 경제적 질서가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도 개국이래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채택된 주자학은 피폐된 사
Ⅰ. 다산 정약용 약력
다산 정약용은 1762(영조38)년에 태어나 1836(헌종2)년에 세상을 떠났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친 조선조영조정조순조헌종의 기간이 그의 시대이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이며, 약용(若鏞)은 그의 관명이다. 그는 1762년에 현재의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당시의
관료나 학자들로 하여금 보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장적인 학풍이나 사변적인 성리학을 배격하고 급박한 현실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한 결과 종래의 전통적인 사회규범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인식의 태도를 찾게 되었다.
실학사
관물편」「백언해」「이자수어」그리고 「文集」「續集」등에서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시폐를 명확히 분석․비판하고 각기 적절한 개혁안을 내어놓아 당시 봉건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가 이와같이 철학적 사회개혁론을 펴는데 가장큰 원칙은 「經世致用」이었다. 이러한
관이나 관리들은 더욱 탐욕스럽고 공공연하게 백성들을 괴롭히고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공인된 약탈자인 관리들은 백성들을 굶주림과 도둑질 이외는 달리 다른 삶을 선택할 여지가 없는 극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었다. 곡식을 생산한 백성들은 그것을 먹지 못하고 오히려 생산하지 않은